금사디미로의 초대.
금사디미에 대한 추억담만 가득 하고
금사디미의 실체는 아직 거의 공개된적이 없는듯 합니다.
이렇게 올리려고 찍은 사진은 아니고
2007 년 어느 여름날 한 친구가 먼저 하늘나라로의 부름을 받고 떠나
몇 일행과 금사디미를 찾았을때 동행한 친구가 찍어 준 사진 입니다.
이 사진은 금사디미 마을 입구 입니다.
큰아버님댁 입구서 마을 입구를 향하여 촬영된 사진입니다.
보이는쪽 왼쪽이 큰아버님댁 담벼락 이구요
오른쪽 아래는 배밭인데 하촌아재네 밭입니다.
보이는 저 끝자락 슬레트 집이 보이는 바로 앞 부분이 마을로 진입하는
도로가 있습니다.
저곳에 저 슬레트 집이 들어서기 전에
아주 크고 늙어 입이 있었는지 조차 가물 거리는 기억속에
밤나무가 한그루 있었습니다.
우린 그곳을 밤나무앞이라고 불렀고 그곳에서 겨울이면 온동네 아이들이 목자던지기( 납작한 돌을 던져 정해놓은 홈에 넣는것)
를 하기도 하고 구슬치기도 하였었죠
그 길은 입구가 T 가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그 아름답던 금사디미..
눈 감으고 손 내밀면 닿을듯한 그곳이 세월의 무심히 흐름에 떠난 이들은 늘고
찾는 이는 적어 담벼락에는 이끼낀 담벼락만이 금사디미를 외롭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보이는쪽 오른쪽 하늘색 낡은 대문이 큰아버님댁 입니다.
사진의 어느곳을 보아도 세월의 아련함이 느껴집니다..
이곳은 큰아버님댁 마당입니다.
저 집에는 큰아버님 내외분과 사촌오빠 두분과 언니 두분이 같이 사셨죠
더 먼 기억으로는 할아버지도 계셨드랬어요
아버지 형제중 맏형이셨던 저 큰집은 언제나 위풍당당함이 였고
어린 나이에 큰집은 토지에 나오는 최참판댁을 연상케 했었지요
사진 끝자락에 보이는 장독대..
큰어머니께서....평생을 오르내리셨으며..가족의 먹거리를 장만 하시느라..
장을 담그시고..고추장을 을..담궈..발효를 시키시던 그 장독대..
이제..시골에서도..장독대는 더이상 ..그 집의 실세의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하는듯 합니다..
대부분 장독대는 비어 있었거든요
어느집이나..샘표 간장이..있으며..순창 고추장이..있고..또..그 많은 된장과..
함께 머물며 같이 먹어줄...사람이 함께 하지 못하기..때문이겠죠..
이 집은 큰집 대문을 열고 나와 왼쪽으로 몇걸음후 오른쪽을 바라보면 보이는
이장아재네 집입니다.
제가 금사디미 시절 이장 아재는 동네서 제일 유식하신 분이셨다 여겼고
면사무소서나 어디서 손님이 오시면
모두모두 이장아재네집으로 가셨죠..
그리고 또 이장 아재는 동네 아이들 대부분의 이름을 지어 주셨고 그 중에 제 이름도
이장아재께서 지어 주셨다고 합니다.
이곳은 큰아버님댁 사랑채 앞입니다.
사진 뒤로 보이는 농기구를 보관 하는 곳인데 처마끝이 저리도 허리굽혀
사진으로 보노라니 아슬아슬 합니다.
저 날 비가..추적 거리고 떨어지는 시간에..큰집 대문을 예고 없이 열었을때에...
큰아버지께서는...올 여름 지독한 장마로..싹이 나버린 유월 양대를..손질하고 계셨습니다( 강남콩이라고도 하고 호랑이콩이라고도 하데요)
그 많은 연세 임에도 불구하시고..안경도 없이 한눈에 알아보시고..
비오는데 니가 기빌도 없이 어쩐일이냐고..반기셨지요..
비 때문에..사랑채 쪽에서 비를 피하며 무엇 때문에..금사디미를
각중에 (갑자기 )..찾았는지..를 말씀드리며..서로간..반가움을 나누었습니다
내사랑 금사디미에..머무시는 큰아버지..백발의 머리카락이..안스럽고..가슴아팠으며..
세월이 흐름에 따라..자꾸만..조그맣게..작아지시는..큰아버지..
지금처럼...약간의 시간이 허락하는 쯤이면..훌쩍 차를 몰아..
삐걱 거리는 대문을 열고...달려들어가..큰아버지~~저랑 국밥 드시러 가요~~
하면서..가고싶지만..일상은..늘..그리움만 만들어 놓고..
가슴앓이만 시켰는데 지금은 정말 다시는 만날수 없는 길을 가버리셨습니다.
훗~..폼이 여간 아니죠..? 비가 추적 거리고 내렸고..습도가 높아서..제법 더웠습니다..
큰아버지께서는 혼자서 점심을 드신 뒤라 하셨고..방에 들어 가자고 하시는걸..
서둘러 집엘 돌아와야 한다며..사랑채 쪽에서..저런 자세로 서서 너스레를
떠는 저를..그래도..큰아버지는...이뻐만..하시고..김서방의 안부와..아이들의 안부를 물으셨지요..
저곳에서 서울까지 올려면 퇴근시간 전에 집에 도착해야 길에서 시간을 다보내지 않기 때문에
마음편히 머물수가 없었어요
큰아버지..
저 깊고 깊은 주름의 골짜기 사이마다..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으셨을까요..
사람들이 오랜만에 모이면 자꾸 노래를 하시라고 하셨던 큰아버지..
만날때마다 겨울..농사철이 끝나면 저희집에서 몇달 보내고 싶어 하셨는데..
가시고 나니 그렇게 해드리지 못한게 제일 한이 됩니다..
그리도..같이 머물고 싶어 하셨던..큰아버지셨는데..
이 냇가는 제가 그리 찬양을 아끼지 아니하던 금사디미 냇가입니다.
지금은 꼬라지 저래도 한때는 저곳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릅니다.
뚝과 산 사이가 제법 넓은데요 지금처럼 저렇게 흉물스럽지 않았어요
번듯한 뚝이 생겨나 차량 통행도 되고 좋아진것두 있지만
우린 금빛 모래를 잃었고 아침과 노을이 질 무렵 물을 차오르며 높이뛰기 경주를 하던 물고기들을
바라볼수 없게 되었죠..
바라보이는 작은 산을 희돌아 나가면 금사디미 마을이 있습니다.
저 때는 장마가 끝날 무렵이라 물빛이 청명하진 않지만 그래도 물살을 가르며 흐를 물이라도 있지만
대부분 비쩍 말라..꼬라지가 제법 미울때가 많습니다.
뚝에 지혼자 크고자란 익모초를 보고 욕심이 나서 수확중입니다.
ㅎㅎㅎ
도심에선 귀하디 귀한 약초인데
저곳에서는 어른키 보다 더 큰 익모초가 사방에 지천으로 널부러져 있었습니다.
사실 저날 얼마 수확 해오지 못했어요..
담을 보따리도 없었고 일행인 친구가 얼마나 구박을 하는지..
ㅎㅎㅎ
- 사진에 대한 설명-
지난 2007 년 여름..날마다 비가 오고..태양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던
어느날..친구가 세상과의 인연의 고리를 끊었다는 부고가..날아 들었습니다..
포항 에서 아이들과 생활을 하였기에 포항서 빈소를 마련하고
대구나 그 근처 친구들은 포항으로 문상을 가고..
금사디미..안마에서..잠든다길래..서울에 있는 친구와 금사디미로 문상을 갔었습니다..
금사디미 도착 하니..아직 장의차가 도착 전이였고..마을 어귀에서..
수 분 서성이다보니..친구를 실은 차가 도착 하였고..
일행중에..이장아재 아들 형기..안마 경선이..언터 아지매 아들 경화..
아릿터 경삼이..경욱이 등등이..경호의 가는 길을 ..슬퍼 하고 있었죠..
아릿터에...차들을 모두 주차를 하고..거기서..한번 제를 올리고..
안마까지..동창들이..경호를 메고..갔습니다..
그 뒤를 따라..친구 엄마의의 통곡 소리가..새매바우...넘어까지..울렸퍼졌으며..
아들을 앞서 보낸 그 어미의 비통함이..날 선..칼날처럼..가슴에..
찢기울 만치..파고 들었습니다.
안마 도착 하고 보니..밑에 큰 엄마와 가게 언니..등..마을 여러분께서..
음식이며..등등..경호네..일을 돕고 게셨습니다..
거기서..친구들의 마음을 전하고..간단한 점심을 먹고..
내려와..큰아버지를 잠시 뵈었었지요..
사진은 같이 동행한 동창이..사진찍기를 좋아하여..늘 차 안에..카메라가
들어 있는데..제가.큰아부지랑..이야기 도중..혼자 뻘쭘 한지..
여기저기 눈길따라 사진을 찍어 메일로 보내주었습니다..
첨 건네 받을땐 그냥 그랬는데 지금 아주 요긴하게 금사디미를 말해 주는 자료가
되었습니다.
자료가 손에 닿는 대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